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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텔링

세상이 이렇게...국민들 어쩌라고

 

 

 

◆대리기사

 

대리기사는

네온사인이 물드는 저녁 무렵 일터로 나선다.

퇴근은

한강에 물안개가 피어나는 새벽녘이다.

그에겐

'스피드가 돈'이다.

하얗게 새우는 밤보다 애환이 먼저 쌓인다.

목적지에 다 온

승객이 자기 집을 못 찾아 헤맨다.

때론 술에 절어 쓰러져 있다.

할 수 없이

지갑을 뒤져 주소를 찾는다.

도둑으로 오해도 받는다.

휴대전화에서

집 전화를 알아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아무리 깨워도 꿈쩍 않던 손님이

아내가 와서 고함치면 벌떡 일어난다.


▶1980년대 초반

경찰에 음주 측정기가 널리 퍼지면서

대리운전도 자리를 잡았다.

 

신문이 새로운 현상을 다뤘다.

'마음 놓고 술 드세요'

'대리운전 성업 중'

 

'고급 술집, 대리기사 내세운 새 상술(商術)'….

요금은 1만5000~3만원 선불이었다.

지금이나 별반 다름없다.

근래 시장이 급격히 커졌다.

요즘엔

시장 규모가 한 해 4조원대라는 말도 나돈다.

사업장 3000곳에, 종사자가 20만이 넘고,

하루 고객이 70만 가까운 호시절도 있었다.

 대리기사
▶일본은

70년대 중반부터 사업 형태로 대리운전이 생겼다.

미국엔

음주 일행에서 한 명은 술을 못 먹게 하는

'지명 운전자 프로그램'을 다들 따랐다.

술집 주인이

고객의 운전 불능을 판정하는 '팁시 프로그램',

연말연시에만 공짜로 태워다주는 '소버 캡'도 선보였다.

뉴욕 어느 회사는 가입비 45달러에

대리운전 한 차례마다 38달러를 받았다.

운전대 맡겨본 한국인들은

"대리운전비 빼고는 모든 게

미국이 한국보다 싸다"고들 했다.



▶야당 의원과

세월호 유족이 연루된 대리기사 폭행 사건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듯 들춰냈다.

사단은 서울 여의도에서 벌어졌다.

돈이 몰리고 정객이 북적대는 곳이다.

대리기사 이모씨는

사업에 실패한 50대 가장이다.

삶의 벼랑 끝을 구경한 사람이다.

그 달고 쓴 맛을 다 봤기에

물러설 수 없는 선(線)도 생겼다.

상대가 준 명함을 들고

"국회의원이 뭔데?" 하고 묻는,

인간 존엄의 저항선을 가진 남자다.

▶대리기사가

하루 10시간 일해도 손에 쥐는 건

4인 가구 최저생계비를 밑돈다.

사업장에 20% 떼주고도 보험료,

알선 콜센터에 내는 '콜비(費)'까지 스스로 감당한다.

호출에 1분이라도 늦어

승객이 그냥 떠나도 콜비 3000원을 내야 한다.

승객이

콜센터에 항의하면 무조건 벌칙을 감수한다.

말썽이 커지면 일터를 잃는다.

4대 보험 혜택도 없다.

대리운전자와 고객을 함께 보호할

법안이 상임위에 올라와 있지만

국회는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다.

퇴근길 새벽달이 더 서글프다.

by/김광일 논설위원실

◆대리기사 李씨가 겪은 '세월호 후유증'

 

대리기사 이모(52)씨는 지난 9월 16일 밤,

서울 여의도에서 안산까지 가는

대리 콜을 받고 달려가면서 '즐거운' 상상을 했다.

"안산까지 대리비 2만5000원,

거기서

운 좋게 집이 있는 부천 가는 콜까지 받으면

2만원 더 벌 수 있겠다."

하루 평균 다섯 번 콜을 받아

콜센터 수수료와 교통비 등을 떼고

자기 손에 떨어지는

순소득이 5만원 안팎인 대리기사에게

하룻밤 장거리 두 탕은 흔한 운수가 아니었다.

여의도 술집에서

손님들을 모시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한 사람이

"제가 오늘 폭탄주 몇 잔 마셨는지 아세요"라고 했다.

다들 얼굴이 벌건 상태였고,

술 냄새가 풀풀 났다.

손님들은

보통 사람들 귀에도 익은

야당 정치인 이름을 거론하며

"OOO은 살려두기로 했다"고 했다.

자신들이

거물급 정치인의 진퇴(進退)를

좌우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한 손님이

"내가 부위원장 아닙니까"라고 하자

다른 손님이 그 말을 받아

"그냥 부위원장이 아니죠.

수석부위원장님이죠"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이씨는

'정치판 사람들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과

세월호 대책위 김병권 위원장,

김형기 수석부위원장을 비롯한 유가족들이었다.

술집에서 길 건너 주차장까지 가는데

손님들은 몇 차례나 멈춰 서서 대화를 했다.

그렇게 30분가량이 흘렀다.

이렇게

시간이 늘어져서는 안산을 거쳐 부천 집까지

제대로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씨는

자동차 열쇠를 다시 건네면서

"그냥 가겠다"고 했다.

김현 의원은

"어, 이렇게 가시면 안 되지.

거기 서봐요.

소속이 어디예요.

콜센터 번호 줘봐요"라고 했다.

세상을 온통 시끄럽게 만든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날은

이씨가 기대했던 '운수 좋은 날'이 아니었다.

전화 신고를 받고 경찰이 달려왔다.

이씨와 이씨를 구하려다 함께

폭행에 휘말린 목격자들이 경찰 승합차에 올랐다.

김현 의원은

잠시 경찰서에 들렀다가 사라졌다.

이씨를 때린 유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조사가 길어지면서

이씨는 온몸에 통증(痛症)을 느꼈다.

이씨와 목격자들은 밤샘조사를 마치고

새벽 4시 반에 경찰서를 나섰다.

이씨는 17일 아침 9시,

동네 병원이 문을 열자마자 찾아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간단한 치료를 받았는데

15만원이 청구됐다.

3만~4만원이면 될 줄 알았는데….

이씨는 돈을 구해 오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간밤의 폭행 사건이 아침 방송 뉴스를 타면서

이씨 휴대폰은 불이 나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세월호 대책위원회는

"이번 일로 인해 실망하신 유가족과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다소 엇갈리는 사실 관계는 경찰 조사를 통해

정확히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데 대한 유감 표명일 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말은 아니었다.

사과 대상도 다른 유가족들과 국민이었다.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이씨에 대해

"미안하다"거나 "사과한다"는 말은 없었다.

세월호특별법을 위해 단식을 했던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대리기사 폭행은)

저쪽에서 파놓은 함정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장에서

이씨를 "국정원 직원 아니냐"고 몰아붙였던

유가족들과 똑같은 상상을 한 것이다.

사고가 있던 날로부터 엿새가 지난 23일에야

이씨를 폭행했던 유가족들이

이씨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답을 않고 망설이고 있는데

밤 9시쯤 유가족들이 이씨가 입원 중인

병실 문을 불쑥 열고 들어왔다.

유가족들이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꺼내자

그들과 함께 온 처음 보는 사람이

당시 상황을 캐묻기 시작했다.

유가족들과 목격자들 간의 2차 충돌을

'쌍방 폭행'으로 몰고 가는 데 필요한

이씨의 증언(證言)을 얻어내고 싶은 눈치였다.

이씨는

"사과를 하러 왔으면 사과만 하고 가세요.

그런 말씀은

경찰서에 가서 하시고요"라고 쏘아붙였다.

김현 의원도 25일

'사과하러 가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씨는 거절했다.

이씨는

"김 의원은 경찰 조사에서 '반말한 적 없다'

'폭행당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

정말 그렇다면

나한테 사과할 일도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씨는

세월호 성금을 냈고,

세월호 분향소에도 다녀왔으며,

세월호 진실 규명을 위한 서명도 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일로 정말 충격을 받았다.

얻어맞은 상처만 아픈 게 아니었다.

이씨는

"사람은 술을 마실 수 있고,

술을 마시면 실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후 일 처리 과정에서 보인

그 사람들의 태도는 정말 실망스럽다"고 했다.

 

by/김창균 부국장 겸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