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대한민국◈
백개의 연못사이로 무심히 봄만 흐르네
한때는 심심산중이었다.
서울에서 새벽 첫 차를 타면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야 도착했다.
제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인생처럼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으면 오래 걸어 땀에 젖은 온몸에 설악이 담뿍 스며들었다.
대청봉에서 딱 백 개째의 연못이 있는 지점에 위치해 백담(百潭),
그때 백담산장은 대자연에 뛰어든 사람들이 몸을 누이고 배를 채우는 거점으로 산장의 역할을 다했다.
적폐의 대통령이 백담사에 숨어들자 백담산장은 전투경찰들이 군화를 벗는 숙소가 되었고,
시절의 무거움을 못 이겨 무너졌다 다시 서는 동안 기나긴 백담계곡엔 어느새 도로가 깔리고 셔틀버스가 다닌다.
산자락을 다 잃어 산장의 필요도 없어진 그곳에 돌 빛깔 은은한 건물 한 채가 '백담탐방안내소'라는 명판을 걸고
무상하게 남겨져 있다. 이것은 사라진 산장에 대한 소고, 백담산장은 이제 없다.
너무 많
↑ 1959년 백담사 사진.대웅전과 요사체 몇 개만이 고즈넉하다.사진출처:김근원 사진포커스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쉽게 오르는 백담계곡
무슨 소원이 이리 많은가.
셔틀버스 주차장에서 백담사로 향하는 엄중한 돌다리 아래 무수한 돌탑들이 늘어서 있다.
평일 오전에도 색색의 등산복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대청봉을 향한다.
기도발이 잘 듣는다며 봉정암으로 길을 서두르는 불자들도 적지 않다.
덕분인지 탓인지 백담사는 올 때마다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다. 이날도 한쪽에선 공사가 한창이다.
↑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의 긴 계곡에 돌탑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님의 침묵'을 집필하던 백담사는 지금과는 다른 공간이리라.
고즈넉한 작은 사찰이 오늘의 모습을 갖춘 것은 던적스런 치세 끝에 백담사 화엄실에 몸을 숨겼던 12대 대통령 전두환 때문이다.
사뭇 비교되는 두 개의 특별한 인생 중에 무엇을 지향하고 지양할 지는 저마다의 몫이겠지만
사찰이 이리 번잡해졌으니 부처님도 꽤나 피곤하시겠구나, 객쩍은 생각이 절로 든다.
"저 돌탑들이 봉정암까지 이어져있어요. 어마어마하죠.
돌탑을 쌓느라 계곡의 바닥이 들어났습니다. 자연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아니죠."
설악녹색연합 대표이자 산양연구가인 박그림씨가 다리를 건너며 설명한다.
넓은 개울을 가득채운 돌탑이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리는 봉정암까지 계속된다니, 치성이 갸륵하기 전에 아득하다.
현재 설악산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사람이 너무 많아진 결과라며 박그림씨가 씁쓸하게 웃는다.
길이 쉬워지면 사람은 늘어나고, 사람이 늘어날수록 산은 비어간다.
사람이 산을 착취하는 슬픈 구조를 막아보고자 20년째 애쓰고 있는
박그림씨는 현재 백담산장(현 백담탐방안낸소)의 2층을 산양연구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 백담사 전경.일주문 옆에는 템플 스테이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백담산장, 산과 인간의 역사
1968년 백담산장 건축의 중심에는 윤두선씨가 있었다.
1920대 출생해 이른바 한국의 산악인 2세대에 속하는 윤두선씨는 광복 직후 조선산악회 창설에도 참여했고
학생산악연맹 회원으로 한국산악회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한 명성 있는 산악인이다.
그는 1960년대 말, 현재의 백담탐방안내소 자리에 계곡의 돌과 나무를 사용해 조촐한 산장을 짓고
15년 동안 그곳을 지켰다.
산꾼들의 숙소로,때로는 등산학교로,
김지하 시인이 숨어들었던 시대의 피신처로 백담산장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윤두선씨는 '산장지기'가 아닌 '설악산 주인장'이다.
80년대 초 백담산장은 무허가 시설로 지목되어 철거통보를 받는다.
윤두선씨는 인가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설악산을 내려가 1985년 강원도 홍천 오지에 살둔산장을 짓고 생활하다 1995년 작고했다.
↑ 백담사에서 100m정도 떨어진 백담탐방안내소까지 걷는길
최초의 백담산장은 그렇게 철거된 후 1982년 현재의 건물로 신축됐다.
관리를 맡은 강원도 장학회에서 개인에게 임대해 운영하다
1989년 전두환이 백담사 요사채에 은둔하자 전투경찰의 합숙소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1989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백담산장관리권 빼앗긴 황승근씨의 하소연'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백담산장이 전경의 숙소로 변하게 된 과정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87년 초부터 강원도로부터 500만원에 백담산장 관리권을 임대받아
관리해왔던 황승근씨는 89년 1월 5일 관리권을 백담사에 넘기라는 강원도의 통보를 받고
같은 달 18일 쫓기다시피 백담산장을 나오게 된다.
그 후 강원도를 비롯한 관계요로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피해보상을 받지는 못했다.
1990년 12월 전두환이 백담사를 떠나자 백담산장에 울리던 군화 소리도 겨우 사라졌다.
이후에는 백담대피소로 이름을 변경하고 산장 및 대피소의 명맥을 유지했으나
100m아래 백담사 코앞까지 올라오는 셔틀버스로 인해 기능과 필요성을 잃고 결국 2005년 폐쇄되었다.
한동안 폐가로 버려졌던 백담산장은 2008년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리모델링 후 백담탐방안내소로 이름과 쓰임을 바꾸어 개소했다.
현재 백담탐방안내소에서는 산양, 수달 등 백담계곡 부근에 서식하는
야생동물 박제 31점, 곤충표본 234점과 각종 탐방정보 게시물이 전시하고 있다.
↑ 설악녹색연합 대표이자 산양연구가인 박그림씨가 백담탐방안내소 2층 자신의 연구실에서 산양과 설악산의 미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제된 동물들이 사는 불 꺼진 백담탐방안내소
봄은 무심히, 무상하게 푸르다.
셔틀버스 주차장에서 백담탐방안내소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악수를 나누고 자기소개를 끝낼 시간이면 벌써 입구에 도착한다.
둥근 돌을 다닥다닥 붙여 멋을 낸 안내소에서 박그림씨는 취재단을 정문이 아닌 측면의 작은 문으로 안내한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문구가 선명하다.
백담탐방안내소 개소 당시 운영계획을 보면 멸종위기 야생동물을 테마로 전시관을 운영하며
전문 자연환경안내원 2명이 상주하여 자연해설과 탐방안내를 전담한다고 기록되어있다.
↑ 백담탐방안내소는 2008년 리모델링 후 개소하였다. 1층은 전시실과 안내소로 2층은 산양연구소로 쓰인다.
이날 방문은 평일 10시쯤에 이뤄졌으나 안내소의 불은 꺼져있었고 안내원 역시 보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전시관의 박제된 동물들이 어쩐지 을씨년스럽다.
서둘러 좁은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오른다.
산장이었던 시절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는 안내소 2층의 천장이 낮고 해가 드는 작은 방에 앉으니 마음이 조금 온화해진다.
다닥다닥 붙으면 열댓 명은 잘만한 방 3개 중 2개에는 박그림씨가 수집한 산양에 대한 자료들이 쌓여있고 하나는 연구실로 쓰인다.
"이 주변이 전부 산양서식지입니다.
설악산에서 가장 많은 양의 산양들이 살고 있지요.
그래서 전부터 이곳을 산양연구와 홍보의 기능을 하는 생태박물관으로 만들자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백담산장이 대피소의 기능을 잃고 2005년 폐쇄된 후에 백담사의 요청으로 공단에서 이곳의 철거를 결정하더군요.
당시 환경부의 박선숙 차관을 찾아가서 면담 끝에 철거는 철회되었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건물 전체를 산양박물관으로 쓰려던 계획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래층은 탐방안내소, 위층은 산양연구소로 쓰기로 공단과 합의를 하고 지금에 이른 거지요."
↑ 백담탐방안내소 1층 전시실 전경.
현재 설악산에는 약 230마리의 산양이 서식하고 그 중 대부분이 백담계곡에서 봉정암 사이의 내설악에 산다.
박그림씨가 산양의 숫자를 얘기하면 설악산의 어제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렇게 적으냐고 놀라고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생각보다 많다고 답한다고 한다.
230마리는 많은가,혹은 적은가. 적어도 환경에 대한 기준을 높이지 않으면 인간이 기대어 살 자연의 그릇이 점점 작아질 것만은 확실하다.
↑ 31점의 크고 작은 야생동물 박제와 곤충표본 234점, 각종 탐방정보 게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환경운동을 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개발이 결정되면 손을 텁니다.
사업이 실패했다고 보는 거지요. 하지만 환경운동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공사가 시작되고
이길 가능성이 없어져도 문제제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데, 한번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는 것을 그만둘 수 있습니까?"
↑ 윤두선씨가 관리하던 시절의 1974년 백담산장에서 열렸던 제1회 어린이 등산학교의 모습.
박그림씨는 20대에 설악산에서 처음 산양과 마주쳤다.
그는 산에 깊이 스며드는 경험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설악산의 대자연을 지키려는 박그림씨의 노력은 삶처럼 절실하게 이어질 것이다.
언젠가 백담탐방안내소가 산양생태박물관으로 바뀌고 설악산에 산양이 그득한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 백담탐방안내소 외벽에 붙은 나비모형, 유리문에는 동물 스티커가 붙어있다.
저 산은 내게 오지마라, 오지마라 하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2007년 발행한<국립공원 수용력 관리시스템 연구서>에 따르면
설악산국립공원의 최대 수용력은 하루 32,818명, 연간 1,656,303명이다.
이마저도 환경피해도를 5~6등급으로 설정했을 경우다.
그러나 실제로 성수기 설악산에는 하루 7만 명의 인파가 몰린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입산예약제이다.
이는 통제가 아니라 차라리 산에 대한 예의에 가깝다. 설악산이 피폐한 얼굴로 묻는다.
"당신 집에 매일 100명의 손님이 찾아온다면 어떻겠습니까?"
↑ 산장은 간데없고 물은 마르고 백담계곡의 봄 잎사귀만 무심히 푸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쉽게 설악산을 오르는 현실은 설악산 훼손의 원인이자
백담산장이 사라진 이유이기도 하다.
꼬불꼬불한 계곡을 따라 7km를 걸어 올라야했던 백담산장이
2300원을 내고 셔틀버스에 타면 15분 안에 도착하는 백담탐방안내소로 변한 지금,
사람들은 산이 힘들고 불편해야 마땅함을 잊었다.
자연에 대한 염치보다 경제논리가 우선하고,
관광객들이 누리는 약간의 안락과 편의를 위해 산이 깎이고 인공물이 늘어나고
짐승이 제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당연하다 한다.
백 개의 연못 사이로 계곡의 물소리도 마른다. 백담산장은 그렇게 사라졌다.
<Monthly 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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