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風(광풍)이 불어닥친 순간이었다.
“잠깐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1999년 2월 10일 오전 7시, 서울시 한남동 崔淳永(최순영·70) 신동아그룹 회장 자택에 검찰 수사관 3명이 들이닥쳤다. 최 회장과 신동아그룹에 |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오. 영장을 보여주시오.”
“가보시면 압니다.”
최 회장은 영문도 모른 채 검찰로 연행됐다. 이튿날 그는 외화밀반출, 계열사 불법대출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 그는 검찰조사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자산규모 20조원의 신동아그룹이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구속은 ‘ 그룹 해체’라는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는 신호탄이었다.
두 차례의 구속. 평생 일군 회사와 사회적 지위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치욕뿐이었다. 그는 그룹 총수치고는 꽤나 긴 2년6개월간 구치소 신세를 졌다. 구속 8개월 만인 1999년 10월 보석으로 석방됐다가 2005년 1월 다시 법정구속됐다. 해를 넘겨 2006년 9월 건강악화로 구치소에서 쓰러지자 병원으로 실려갔다. 몸은 밖에 있었지만 지루한 법정공방은 계속됐다.
“신앙의 힘으로 참고 견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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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그룹이 공중분해된 지 10년 만에 입을 연 최순영 前 회장. |
李明博(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8월,
그러나 세상까지 그를 자유인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거액의 추징금을 내지 않은 부도덕한 기업인이라는 이유로 세상은 그의 사면을 ‘특혜’로 봤다.
그래서 그는 큰 마음을 먹었다.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10년간 묻어뒀던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됐다고 용기를 낸 것이다.
취재진은 서울시 양재동에 있는 횃불선교재단을 찾았다. 최순영 회장은 선교재단 이사장실 옆 작은 방을 얻어 쓰고 있었다. 10년 만에 언론과 만나는 탓인지 그의 얼굴은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에 “신앙의 힘으로 참고 버텨왔다”고 했다. 10년 만에 터진 말문은 질문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할 때는 격정적으로,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임직원들에게는 용서를 바라는 죄인의 심정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10년이라는 세월 때문인지, 올해 일흔이 된 나이 때문인지, 그는 세상사를 초월한 사람처럼 보였다.
“10년 동안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동안 재판하느라, 구치소 들락날락하느라 하는 동안 정권이 두 번 바뀌었네요. 정치적으로 엮인 사건은 사회적 여건이나 개인의 희망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더군요.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치가 경제를 앞질러 가고 있어요.”
그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딱 10년 전이네요. 1999년 2월 10일 아침 7시쯤이었어요. 회사에 출근하려고 하는데 건장한 수사관들이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 영장도 없이 강제로 연행당했죠.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그룹 회장에서 순식간에 범죄자가 됐습니다.”
―그동안 언론과 공식 인터뷰를 하지 않은 이유는 뭡니까.
“5년이면 정권이 바뀌잖아요. ‘정권이 바뀌면 할 말을 할 수 있겠구나’고 생각했지요. 정권이 바뀌지 않는 이상 아무리 내 입장을 들어봐 달라고 해 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기다렸죠. 그런데 제 마음대로 안 되더군요. 盧武鉉(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겁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작은 희망을 가졌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어요. 反(반)기업 정서가 강한 정권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어요. 그러고 또 5년을 기다렸죠.”
다행히 정권이 교체됐지만 그의 나이가 벌써 70이 되어 있었다.
“10년 전만 해도 청와대나 국회에 친구들도 많고 知人(지인)도 많았어요. 10년이 지나니까 그 사람들이 안 보여요. 과거에 알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10년이 지나니까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세월보다 더 빨리 변하는 게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가 생각해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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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생명 본사가 있는 63빌딩. |
―연행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당시 한남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이라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요. 노○○라는 수사관이 신분증을 보여주며 ‘가자’는 겁니다. ‘영장을 보자’고 하니까 ‘임의동행 형식이니 가서 말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한참 실랑이를 벌였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그렇게 끌려갔죠.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 가듯 집 앞에서 저를 채 간 겁니다. 아무도 내가 끌려간 걸 몰랐지요. 검찰에 가서 보니 무역하면서 외화 밀반출이다, 계열사 불법대출이다, 별의별 것을 다 뒤집어씌우더군요. 그중에서 외화 밀반출 부분을 집중적으로 캐 물었어요. 아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더군요. 그렇게 들어갔다가 1심 재판이 끝날 무렵인 10월 22일 보석으로 나왔어요. 8개월 만에 나온 셈이죠.”
―연행될 때 직감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없었습니까.
“구속되리라 생각도 안 했어요. 검찰이 주장하는 외화 밀반출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들이 실제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시 김○○이라는 무역업 전문가를 사장으로 채용했는데, 그게 문제가 됐던 것 같아요. 그때 저는 그룹을 운영하면서 보험업과 건설업 등에 주력했어요. 무역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 러시아 무역 전문가로 자처하고 제게 접근한 김씨를 뽑은 게 화근이었어요. 그 사람의 계획적인 사기행각으로 엄청난 재산상의 손해를 봤어요. 김씨는 그룹 계열사인 ‘신아원’이라는 무역회사의 대표이사로 일하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회사를 상대로 가짜 서류를 만들어 오일거래를 한 것처럼 위장해 650만 달러를 빼돌렸어요. 이른바 ‘미야림 오일 사기사건’이었죠.”
사기행위를 숨기려고 위장무역을 실행한 主犯(주범)이 김○○임에도 최순영 회장이 주범으로 몰렸다고 한다.
“그룹 계열사가 은행권으로부터 무역금융을 받아 해외로 송금한 부분은 전액 국내로 반입됐어요. 은행 대출금도 개인적으로 연대보증한 상태라 전액 상환됐고, 금융권에는 부실채권으로 인한 피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튼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지만 검찰 수사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됐어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어요.”
최순영 회장이 구속될 당시 신동아그룹은 22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었다. IMF 직후라 모든 기업들이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신동아그룹은 善戰(선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한생명을 비롯해 동아제분·신동아건설·신동아화재·한일약품·호텔송도비치·태흥산업· 삼풍산업·대생상호신용금고·우정상호신용금고 등이 그룹의 대표회사였지요. IMF라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전 계열사가 부도 없이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1999년도 그룹사의 총자산이 약 19조7000억원이었고, 매출액은 9조2000억원 가량 됐어요. 대한생명이 주력회사였는데 1999년 2월 현재 규모가 14조6800억원에 달했어요. 현금·예금액이 1조원, 언제든지 팔아 현금화할 수 있는 유가증권이 2조5000억원 등 매월 3조5000억원 이상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었죠. 5만여 명의 우수한 영업조직과 450만명의 계약자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매월 5000억원 이상의 수입보험료를 냈습니다.”
―신동아그룹은 당시 재계 서열 몇 위였습니까.
“한국의 실력 있는 기업이라 하면 삼성·현대·LG·대우 등 5대 그룹을 들 수 있겠죠. 나머지 그룹은 서로 비슷했어요. 신동아그룹은 서열상 24~25위 정도였습니다. 삼성이나 현대에 비하면 작은 회사였죠.”
―그룹사 총자산이 20조원 정도면 작은 회사는 아니죠.
“물론 그렇죠. 그런데 정치적으로 사건이 터지니까 하루아침에 계열사가 날아가 버리더군요. 정치적인 사건은 정치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대처하는 방법이 좀 미숙했어요. 또 정권이 설마 그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8개월 동안 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는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보석으로 밖에 나와보니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계열사 중에 대표적인 회사가 대한생명이었어요. 그룹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회사가 공중분해돼 가는 거예요.
물론 구치소 안에 있을 때부터 간접적으로 ‘그룹을 포기하라’는 의사를 전달받았죠. 저를 면회하러 온 사람이 정부 측의 뜻을 가지고 와서 ‘정부가 대한생명, 동아제분 주식을 포기하라고 한다’고 전해줬는데 ‘나는 포기 못 한다’며 반발했죠. ‘너희들이 정정당당하게 기업을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봐라. 이유가 상당하다면 내가 포기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버텼죠. 그래도 계속해서 포기하라는 압력이 있었어요. 결국 포기 안 했죠. 포기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이 정권이 회사를 통째로 가져가려고 하는구나”
![](https://monthly.chosun.com/upload/0903/0903_076_4.jpg) ―압력은 어느 쪽에서 들어왔습니까.
“국세청과 금융감독원이었어요. 그런데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돼 있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제가 구속된 다음날 금감원이 그룹사에 특별검사를 나왔어요. 주식 포기를 종용한 대표적인 사람이 금감委(위) 담당 국장이었어요. 물론 그 사람은 위에서 시키니까 그렇게 했겠죠. 그 런데 그 사람만이 아니에요. 러 루트 통해 주식을 포기하라는 압력이 들어왔어요. 뒤늦게 ‘아, 이 정권이 회사를 통째로 가져가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8개월 만에 나오니까 그때는 정권이 사실상 대한생명을 다 가져간 상태였어요. 눈 뜨고 빼앗긴 셈이죠. 신동아건설·공영사·동아제분·프린스호텔·삼풍도 다 팔아먹었어요. 제 승인도 없이, 8개월 만에 다요. 별 볼 일 없는 것만 남아있더군요.”
―검찰에 구속될 때 계열사 불법대출 혐의를 받았는데요.
“IMF 외환위기 당시 은행들이 계열사에 대한 대출금 상환을 압박하고 있었어요. 이를 방치하면 궁극적으로 대한생명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 사전에 차단하려 했죠. 당시 계열사의 부도를 방지해 그룹 전체의 신인도를 유지하면 이것이 결국 대한생명을 비롯한 그룹 전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당시 IMF 경제위기 상황을 맞아 모든 기업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외자를 유치해 계열사 대출금을 정리하려 했어요. 1998년 6월 8일 미국 생명보험회사인 메트라이프 뉴욕 본사에서 대한생명 주식 50%를 매각하는 조건으로 10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하는 MOU(양해각서)도 체결했죠. 메트라이프는 200여만 달러에 달하는 경비를 지불하며 인원 60여 명을 투입해 1998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간 대한생명을 정밀 실사했어요. 협상이 원만히 진행돼 투자협상 막바지 단계에 와 있었는데 제가 구속되는 바람에 외자유치 협상이 물거품이 돼 버렸죠.”
“金大中 정권이 조만간 신동아그룹 손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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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이수동 아태재단 상임이사. |
―구속 당시 일부 시민단체가 최 회장의 부도덕성을 거론하며 신동아그룹을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진실은 뭡니까.
“IMF 외환위기 당시 재벌기업들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최고조에 달했던 상황에 편승해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 등이 음해성 투서와 모함을 바탕으로 저를 헐뜯었어요. 해외에 호화별장이 있다느니, 자가용 비행기가 있다는 등 허무맹랑한 내용을 언론에 흘려 저를 부도덕한 기업인으로 만들었죠. IMF 사태에 따른 국민적 분노를 풀게 만드는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검찰조사에서 허위사실로 판명났어요. 아직까지 일부에서는 제가 부도덕한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아요.”
―1999년 IMF라는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계열사들이 선방을 하고 있었다면 그룹 해체까지 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까.
“정치적 이유였죠. 그룹 총수를 구속시킨 상태에서 주력기업인 대한생명을 국영화하고 그룹 전체를 공중분해시킨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돼요. 1997년 대선 때 金大中(김대중) 후보 측에 선거자금을 안 낸 기업으로 지목되면서 정치적 보복을 당한 겁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權魯甲(권노갑)씨 등 당시 동교동계 실세들로 구성된 9인의 비선조직 모임에서 ‘손 좀 보기로’ 한 첫 번째 그룹으로 지목된 게 신동아였어요. 비선조직의 실체는 아시아태평양재단 출신인 황○○ 장로의 傳言(전언)으로 알게 됐지요. 이 비선조직은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지만 정권 초기에 필요할 때마다 모여 중요사안을 논의했다고 합니다. 그룹 해체는 DJ 정권의 시나리오에 의해 실행된 거였어요.”
―어떤 근거로 사전 각본이 있었다고 판단하는 겁니까.
“1999년 세상에 알려진 옷로비 사건을 먼저 말씀드려야겠군요. 이 사건의 본질은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인사의 부인이 저의 처를 돕는다는 명분하에 자기의 이익도 챙길 겸 당시 검찰총장 부인인 연정희씨에게 접근해 라스포사 의상실에 가서 외상으로 옷을 사게 하고, 그 옷값을 저의 처에게 대신 내도록 한 것입니다. 저의 처는 도를 넘는 일이라 거절했어요. 그게 다입니다. 실체적 진실은 옷로비 사건이 아니라 ‘옷값 대납요구 거절 사건’이지요. 옷값 대납요구는 제가 구속되기 6개월 전인 1998년 가을 무렵 있었어요. 검찰총장 부인이 연결돼 있으니 검찰총장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신경을 썼죠. 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아울러 저에 대한 이상한 얘기도 돌았어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가깝다고 알려진 조풍언씨에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 조풍언씨는 저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근데 조풍언이가 얼마 후 ‘이 문제는 내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다’는 답변을 전해왔어요. 그러던 와중에 저와 교회활동을 하며 알게 된 김○○ 전 고려대 총장이 ‘ 김대중 정권이 조만간 신동아그룹을 손볼 것’이라며 실세 중 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를 전해주더군요.
그 얘기를 한 사람은 비선조직에서 종교분야를 담당했던 황○○ 장로였습니다. 그당시 황 장로의 이름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분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어요. 비선조직에는 軍(군), 교육, 종교 등 분야별로 담당자가 따로 있었고, 국회의원이나 30년 가까이 김대중씨와 정치를 같이했던 동교동계 실세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권노갑씨였지요. 그들 중에서 신동아그룹 문제에 직접 개입해 좌지우지한 사람은 이수동씨였어요. 아태재단 상임이사를 지낸 분이지요. 그는 김대중씨의 오랜 지인으로 30년간 DJ 집사 역할을 했습니다 (이수동씨는 현재 미국 체류 중-편집자 注).”
“비선조직이 신동아그룹 문제 논의”
―이수동씨가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겁니까.
“나중에 황○○ 장로로부터 직접 들었는데 ‘권노갑씨보다 이수동씨가 더 큰 역할을 한다’고 해요. 이수동씨가 비선조직 모임에서 ‘(대선 때) 정치자금도 안 내고 도와주지도 않았는데 손 좀 보자’는 것이었답니다. 그가 주도했다고 해요. 비선 모임은 이수동씨 집에서 모이기도 했고, 효자동 한정식집에서 모이기도 했답니다. 신동아그룹 문제로 말이죠. 이들은 다른 문제도 서로 논의하곤 했답니다. ‘○○은행장은 그런 사람들이 모임을 유지하면서 자기들 몫을 챙겼다고 해요.”
―황○○ 장로라는 분은 신동아그룹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그분이 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비선 모임에서 저를 옹호했나 봐요. 당시 황 장로는 대통령 부인의 집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해요. 그분은 종교계의 여론을 수집해 대통령께 보고하는 일을 하고 있었죠. 종교계 인사들로부터 ‘(최순영 회장은) 기업인으로서 문제를 일으킬 사람이 아니다’는 얘기를 듣고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해요. 황 장로는 저에 대해 좋은 인상은 아니지만 최소한 나쁜 인상은 갖지 않았나 봅니다. 황 장로는 李姬鎬(이희호) 여사에게 ‘(신동아 문제를) 신중히 해야 된다. 지금처럼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해요.
황 장로가 너무 그러니까, 그가 오히려 위기에 빠졌다고 합니다. ‘ 황 장로가 최순영한테서 20억원을 받아 챙겼다’는 투서가 영부인에게 전달됐어요. 이희호 여사가 황 장로를 불러 ‘최 회장에게서 돈을 받았느냐. 20억원 얘기가 왜 나오느냐’고 물었다고 해요. 황 장로는 펄쩍 뛰면서 ‘그 사람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돈을 받느냐’며 부인했다고 해요. 저는 그 사람에게 돈을 준 적도, 줄 이유도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황 장로와 일면식도 없었죠. 그런 음해성 투서가 영부인에게 전달될 정도였으니 그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만합디다.”
최순영 회장은 “황 장로는 비선조직과 행동을 같이해 그쪽 움직임에 정통했다”고 했다.
“비선조직은 수시로 모여 자기네 이해관계에 얽힌 일들을 협의하곤 했습니다. 거기에 나중에 끼어든 사람이 金泰政(김태정)씨였어요. 검 찰총장이니까 비선조직에 들어갈 리가 없었는데 부인의 ‘고급 옷’ 얘기가 자꾸 흘러나오고 하니까 두어 번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김태정씨는 나를 적극 구속하는 쪽으로 일을 진행했죠.
비선모임에서는 정치자금 문제도 거론됐다고 해요. 당연히 정치자금을 안 낸 제가 좋게 보일 리 없었겠지요. 저는 1992년 대선 때 DJ에게 돈을 주지 않았어요. 1997년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죠.(웃음) 비선모임에서 ‘김영삼이한테는 거액을 주고 우리한테는 단 한 푼도 안 준 회사를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고 해요. 완전히 괘씸죄에 걸린 거죠. 나중에 황 장로에게 들은 얘기지만 신동아그룹을 공중분해시키는 데 대해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해요. 아무튼 그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은 후진국의 典型(전형)이었어요. 기업하는 사람은 정치자금을 당연히 내야 했습니다. 대선자금도 줘야 했고.”
“너희 회장 왜 연락없어” 하면 정치자금 달라는 얘기
![](https://monthly.chosun.com/upload/0903/0903_076_5.jpg) ―1992년 대선 때 金泳三(김영삼) 후보 측에 얼마를 건넸습니까.
“그때는 좀 특수한 상황이었는데 김영삼씨에게 100억원을 줬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도보다 훨씬 많이 전달했습니다. 그게 소문나면서 문제가 됐어요.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의 핵심인사가 내게 와서 ‘최소 1992년 김영삼 후보에게 준 돈 이상을 주셔야겠다’며 선거자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10원도 안 줬어요.”
최순영 회장은 역대 정권 때 제공했던 정치자금을 솔직히 털어놨다. ·관계 인사들에게 선거자금 또는 인사치레로 돈을 전달한 사실을 담담히 얘기했다. 그는 “한국에서 기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政·官界(정·관계)에 돈을 주는 게 관례였다”고 했다.
―정치권에서 어떤 형식으로 돈을 요구합니까.
“직접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간접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당에서 했지요. 비서실장을 통해 ‘야, 너희 회장 왜 아직 연락 없어’ 이런 식으로 압력을 넣습니다. 부드럽게 얘기할 때는 ‘아직 소식이 없군요’라고 하지요. 액수는 얘기 안 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과거 누구한테 얼마를 줬는지 다 알아요. 그래서 그보다 더 많은 액수를 은근히 기대해요.”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씨에게는 얼마를 줬습니까.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는 큰 돈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정치자금을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아요. 전두환 정권 때 63빌딩을 지었어요.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요. 63빌딩 신축허가를 받으려고 육군본부 근처에서 군 고위 관계자 황○○씨와 저녁 한 그릇을 먹었어요. 그게 로비의 전부입니다. 식사값 말고는 돈 한 푼 들어간 게 없어요.
사람들은 저와 관련해 두 가지를 잘못 알고 있어요. 63빌딩 지을 때 정권에 돈을 많이 갖다 바친 것으로 알아요. 사실이 아닙니다. 또 제가 축구협회 회장을 5대 연속으로 8년간 했는데 ‘축구 좋아하는 전두환에게 잘보여서 회장을 오래 한다’는 시각이 많았죠. 그것도 잘못 알려진 겁니다. 저는 1979년부터 축구협회장을 하고 있었어요. 전두환씨가 축구를 좋아해요. 저도 전두환씨와 호흡이 일부 맞았고요. 그러다 보니 자주 만났고 그래서 축구협회장을 계속한 겁니다. 그 사람들(전두환·노태우)에게는 정치자금 준 거 없어요.”
“노태우 대통령에게서 1700억원 받으면 갚겠다”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100억원이라는 거액을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양반(김영삼)하고 아는 사이였습니다만, 사실 크게 도와줄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씨 측근이 제게 와서 ‘지방 유세를 가야 하니 도와달라’고 해요. 그 당시 유세라는 게 쉽게 말하면 지방에 가서 돈을 쓰는 일이죠. 전국을 한번 쭉 돌면서 지방조직에 선거자금을 주는 거죠. 근데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김영삼씨가 돈 없는 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그랬죠. 그 측근이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후보에게 선거자금을 주기로 했는데 그 돈을 안 준다’고 하더군요. 그게 대략 1700억원 정도 됐다고 해요. ‘정권 계승자금’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그건 당신들 얘기지 나하고 뭔 상관이냐’고 했더니 ‘돈이 지난주에 들어오기로 했는데 아직 안 들어왔으니 유세를 못할 형편이다. 지금 사정이 급하니 꼭 도와 달라’는 겁니다. 김영삼씨는 자신의 측근을 삼성, 현대, 대우 이런 큰 기업에 모두 보냈어요. 각 기업에 100억원씩 해서 500억원을 만들 요량이었나 봐요. 측근에게 제가 그랬어요.
‘당신 정말 제 정신이오. 그 사람들(삼성·현대·대우그룹 총수)이야 돈이 있지만, 나는 없어요. 같은 액수(100억)를 요구하면 어떻게 해요.’
그랬더니 그 측근이 ‘돈은 나중에 갚을 테니까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얼마나 급하기에 ‘빌려달라’고 그러겠습니까. 할 수 없이 대한생명에 차용증을 써 주고 개인 자격으로 돈을 빌려 건넸지요.”
―돈은 어떻게 전달했습니까.
“선거가 한창때였는데 김영삼씨가 남산 하얏트호텔 특실에다 방을 잡고 기다리고 있더군요. 100억원을 현금으로 가져가는 건 불가능해 수표로 바꿔 가져갔죠. 수표 양도 많더라고요. 저녁을 같이 하면서 그 자리에서 전달했어요. ‘ 고맙다’고 하더군요.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이런 얘기를 한 게 기억이 나요. SK하고 사돈지간인 노태우 대통령이 정권 말기에 SK 측에 이동통신 허가를 내줬어요. 그게 특혜 어쩌고 하며 난리가 났어요. 근데 김영삼씨가 그걸 뒤집겠다고 했어요. SK에 불똥이 떨어졌죠. 저랑 저녁을 먹으며 김영삼씨가 제게 이동통신에 대해 물어보더군요. ‘최 회장, 이동통신 허가인가 뭔가가 얼마만큼 중요한 거요’라고 해요. 김영삼씨가 경제를 모르긴 정말 모르더군요. 제가 그랬죠.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많은 어려움을 당할까 봐 SK가 반납을 한 겁니다. 그거 어마어마한 이권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이미 허가를 해줬으니 대통령에 당선되면 회복시켜 줘야 합니다.’
제 얘기를 듣고 김영삼씨가 ‘그 정도냐. (허가를 다시) 해줘야겠구먼’ 하더군요. 나중에 제가 SK 회장을 만나 생색을 내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어요.”
“장관들에게 용돈으로 1억원 줘”
![](https://monthly.chosun.com/upload/0903/0903_076_6.jpg) ―다른 그룹 총수들도 김영삼씨에게 비슷한 액수를 냈습니까.
“비슷하게 줬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분수에 넘치는 돈을 줬어요. 당시 제 수준이라면 대략 20억~30억원 정도를 줬어야 해요. 무리하게 돈을 주다 보니 소문이 나 버린 겁니다. 1997년 대선 때 그 얘기가 다시 나왔고, 당시 李會昌(이회창)씨나 김대중씨도 최소 그 액수보다 많이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1997년 대선 때 이회창씨에게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했어요. 1992년 전례를 다시 밟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사실 제가 1976년 선친으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았을 때 부채를 많이 떠안았어요. 선친께서 돌아가시면서 ‘내가 너한테 빚만 남겨주고 가는구나’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회사를 인수할 때 계열사들이 참 어려웠어요. 개인적으로 쓸 돈도 없었지요.”
―돈이 없었음에도 기업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군요.
“요즘에는 많이 달라졌지만 10년 전의 정치상황은 완전히 후진국 스타일이었습니다. 정치자금을 안 주고는 살아날 기업이 없었어요.”
―구속 당시 시중에 ‘최순영 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돈을 받은 정치인들 리스트는 없었습니까.
“그때는 안 밝혀졌지만 그게 왜 없겠어요. 그런데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더군요. 저를 조사하던 검찰이 그 리스트를 굉장히 의식하더라고요. 제게 엄청난 돈을 횡령했다고 몰아세우면서도 ‘ 그 많은 돈을 어디다 썼느냐’고는 묻지 않아요. 당연히 물어봐야 되잖아요. 한번도 안 물어봤어요. 기가 막히더라고. 검찰이 수사의지를 안 보이는데 얘기를 해봐야 뭘 하겠어요. 그래서 안 했죠.”
―그동안 정·관계 인사들에게 준 돈은 얼마나 됩니까.
“관료들의 경우 주로 장관들을 만났는데 용돈 조로 1억원은 줬지요. 그건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겁니다. 뭘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용돈으로 쓰라고 주는 게 그 정도는 됐습니다. 국장급은 계열사 사장들이 주로 만났지요. 돈의 규모도 회사 규모에 따라 차이가 났죠.”
돈 안 낸 기업총수 구속
―다른 그룹도 비슷한 상황이었겠군요.
“현대는 어떻게 했는지 들어봤더니, 鄭周永(정주영) 회장이 직접 안 하고, 각 계열사 사장이 알아서 했다고 해요. 현대 계열사는 모두 튼튼하니까 계열사 사장들이 부처를 배분해 전담한 겁니다. 정주영 회장은 잠수함 수주를 놓고 대우 김우중 회장과 경쟁하다가 정권이 김우중 회장을 밀어 수주에 실패하자 화가 나 대통령에 출마한 측면도 있어요.”
―지금도 기업인들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돈을 준다고 봅니까.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한 가지 경험담을 알려드리죠. 어느 정권이든 권력 實勢(실세)들과 이야기해보면 5년 중 최초 2년간은 실세건 공무원이건 절대로 돈을 안 받아요. 대개 중반 지나야 받지요. 처음엔 청렴하려고 애쓰다가 정권 후반기 가서 일이 벌어지죠.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때가 그랬어요. 김영삼 정권 때는 그 시기가 빨라졌죠. 1년 반 정도 지나면서 실세들이 돈을 받더군요. 김대중 정권 때 와서는 굶주린 이리떼처럼 1년도 안 된 초반부터 파먹더군요. 앞뒤 눈치 보지 않고 말이죠. 그러니까 ‘큰 잔치 벌였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거죠.”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에게 돈을 안 준 이유는 뭡니까.
“제가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어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입니다. 공산당에 대한 생각이 아주 나빠요. 실향민 거의가 그래요. 실향민들이 김대중씨에 대해 갖는 선입견은 매우 안 좋아요. 그런 이유로 안 줬어요. 솔직한 얘기로 그냥 주기 싫었죠. 기업을 하려면 그런 걸 뛰어넘어 싫어도 줘야 했는데….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맞는 말입니다. 제가 미련한 짓을 했죠. 小貪大失(소탐대실)이었어요.(웃음) 김대중 사람들은 나중에 제 회사를 통째로 가져갔습니다.”
―돈을 안 준 기업이 또 있습니까.
“대한항공, 대신증권, 금호그룹도 안 냈어요. 대신증권과 금호그룹은 총수가 호남 쪽 인물이라 살아남았죠. 선거 끝나고 별도로 챙겨준 걸로 압니다. 끝까지 안 낸 대한항공은 나중에 趙亮鎬(조양호) 회장이 구속됐지요. 조직이 크고 사람이 많다 보니 회장이 구속된 대한항공은 경영에 큰 차질이 발생하지 않았어요. 회장 뒤에 수많은 경영진이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신동아그룹의 경우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정·관·재계 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제가 구속되니까 누구 하나 손 쓸 겨를이 없었죠. 제가 회사를 잘못 경영한 탓이죠. 회사는 완전히 마비됐어요.”
―비자금은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기업을 하다 보면 비자금이 꼭 필요해요. 그룹 회장이라면 국회의원, 정부부처 장관, 정권 실세들을 만나 밥도 먹고 용돈도 주는 일이 회장의 중요한 업무였어요. 근데 저는 회사를 인수할 때부터 비자금이 없었어요. 비자금을 만들려고 회사 돈을 빼돌릴 생각도 없었어요.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려고 했죠. 할 수 없이 대한생명에 개인적으로 돈을 빌리는 방법을 택했죠. 제가 가지고 있던 대한생명 주식을 팔아서라도 갚을 요량이었습니다. 물론 영수증을 썼어요. 1976년부터 1999년까지 빌린 돈을 계산해보니 1800억원이나 됐어요. 이 돈을 정·관계 비자금으로 사용했지요. 빌린 돈을 회계장부에 꼼꼼히 다 기재했습니다.
그건 횡령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부분을 횡령으로 몰더라고요. 차라리 비자금을 만들어 썼으면 문제가 안 됐을 수도 있었겠죠. 그 부분이 문제가 돼 소송까지 갔는데 대법원은 저의 손을 들어줬어요. 대여금(빌린 돈)으로 판단했죠. 그런데 나중에 이자를 왜 안 냈느냐, 이렇게 싸움을 걸어와요.”
―회사에 빌린 돈을 갚을 노력은 했습니까.
“물론이죠. 한두 번 갚기도 했어요. 돈이라는 게 이상해요. 쓰기 시작하면 더 모자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IMF 직후 대한생명 주식의 절반을 팔아 회사에 빌린 돈 1800억원을 갚고, 계열사 증자도 하기로 했죠. 그렇게 작심하고 1998년 6월경 미국 뉴욕으로 갔어요. 공교롭게도 김대중씨도 외화를 확보하려고 방미 길에 오른 날이었어요. 물론 비행기는 각자 따로 탔죠. 저는 메트라이프생명 회장을 만나 ‘회사 지분 50%를 내놓겠다. 10억 달러 내라’고 했어요. 당시 10억 달러는 굉장한 돈이었어요. IMF 직후였으니까. MOU를 체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1998년 연말부터 DJ 정권이 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어요.”
金重權·김하중, 최순영 구속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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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권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김하중 전 의전비서관(1999년). |
―결국 외자유치를 못하고 주식처분도 실패로 돌아갔군요.
“제가 메트라이프와 1999년 1월 본계약을 맺으려 하니까 저를 빨리 구속하려 했던 것 같아요. 10억 달러가 들어오면 아무리 문제가 있더라도 당시 상황에서 구속까지는 못 시켰을 겁니다.”
최순영 회장은 자신의 구속과 이른바 ‘옷로비 사건’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1998년 연말 당시 옷로비 의혹 첩보가 청와대를 중심으로 사정·정보기관에 입수되자 부인이 연루된 김태정 검찰총장이 저를 구속시키려 했어요. 구속은 검찰총장이 결재하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대통령한테까지 구속 품의서를 올렸던 거예요. 1998년 12월 그리고 1999년 1월, 두 번이나요. 이게 청와대에서 브레이크가 걸렸어요. 그때 결재판을 대통령에게 가져간 사람이 金重權(김중권) 청와대비서실장과 金夏中(김하중) 당시 의전비서관이었어요. 그분들이 대통령에게 ‘IMF 상황이라 기업이 어려운데 그룹 총수를 구속하면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고 김대중씨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해요. 구속이 안 되자 정권 실세 비선조직이 당황했다고 해요. 어느 정권이나 대통령이 된 사람은 처음에는 국가를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이번에는 청와대 사직동 팀이 움직였어요. 이전까지만 해도 朴柱宣(박주선) 당시 법무비서관이 김태정 총장을 돕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박주선씨가 ‘옷로비 사건의 실체를 밝혀라’고 사직동 팀에 지시했어요. 이 같은 내사 관련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보고됐는데 그게 공개됐어요. 나중에 김태정씨와 박주선씨 간에 공문서를 줬냐 안 줬냐 하며 다툼이 벌어졌죠. 아무튼 저와 집사람을 구속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됐고 마침내 허위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전달됐어요. 결국 대통령의 ‘구속’ 裁可(재가)가 났지요. 결재가 난 다음 날 검찰이 저의 집 앞까지 와 저를 잡아간 겁니다.”
‘우리 큰 잔치 하나 벌였다’
최순영 회장은 ‘대통령의 애국심’에 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경험담을 잠시 들려줬다.
“전두환씨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였어요. 어느 식사자리였는데 대통령이 된 소감을 솔직히 털어놓더군요. 그에게서 ‘4시간 강의’를 들었죠. 그중 기억나는 말이 있어요.
‘최 회장, 대통령이 되면 말이오, 애국자가 안 될 수가 없구먼. 국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국민들도 잘살아야겠고, 수출도 많이 해야겠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책임감이 따라오니까 애국자가 안 될 수 없어요.’
그분이 힘으로 권력을 빼앗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보였어요. 전두환씨는 취임 후 장관보다 국장이 더 나은 거 같아 국장들과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해요. 경제공부도 국장들에게서 배웠답니다. 김대중씨도 국가 책임자로서 IMF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인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결국 최 회장의 구속에 동의한 것 아닙니까.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여러 번 들으면 실제로 나쁜 놈으로 보이겠죠. 그런데 문제는 김대중씨의 실세 비선조직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김대중씨 밑에서 야당생활을 하며 30년을 굶은 사람들이에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기업을 뜯어먹은 겁니다. 대표적인 게 신동아그룹입니다. 대한생명, 신동아건설 팔아먹으면서 오죽 했겠어요? 1000원짜리를 아는 사람에게 반값에 주기도 하고 100원에 팔면서 400~500원 받아먹고, 별의별 짓을 다 한 거예요. 회사 매각 처분이 잘못됐다고 조사해 달라고 수없이 이야기해도 馬耳東風(마이동풍)이었어요. 지금이라도 조사해야 해요.”
1977년 설립된 신동아건설은 2001년 시공능력 평가액이 2815억원으로 업계 42위를 차지(한때 28위 기록)한 중견 건설회사였다. 신동아건설은 당초 매각 대상이 아니었는데 김대중 정권 들어 급부상한 일해토건에 전격 매각됐다. 일해토건은 DJ 정권 당시 관급공사를 대거 수주해 1999년 916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급성장한 무명의 토목건설업체였다. 일해토건은 신동아건설 주가를 주당 1원으로 평가해 1억7700만원에 인수했다(채무 870억원 승계).
최순영 회장은 “여권 실세들과의 친분관계를 이용한 로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참으로 이상한 매각이었어요. 특혜였죠. 계약시점을 실제보다 6개월이나 앞당겨 신동아건설이 2001년 3월 보유하고 있던 현금자산 400억원을 변칙으로 처리해 대출금과 상계처리했어요. 대한생명의 경우도 채무액 4037억원 가운데 채무액의 80%에 가까운 3167억원을 조건 없이 탕감 받았어요. 당시 여권실세들과의 친분관계를 이용한 로비의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다 동교동 실세들에 의해 이루어졌어요. 정부가 임명한 이○○씨가 대한생명 회장으로 와서 신동아건설 등 계열사 매각을 주도했지요. 그 사람이 혼자 매각업무를 결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권 실세들과 연결돼 있었던 거예요. 나중에 황○○ 장로가 비선조직 사람들을 만나니까 ‘우리 큰 잔치 하나 벌였다’고 그랬답니다. 신동아그룹 해체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그러더라는 거예요. 제 속이 얼마나 뒤집히겠어요. 그 소리를 듣고 큰 상처를 받았어요.
회사를 인수한 쪽은 호남계열이었어요. 좋은 조건으로 매각하겠다는 사람이 있어도 자기편 사람에게 매각한 겁니다. 소위 프○○그룹이라는 데가 한 예입니다. 어마어마한 비리가 많은데 조사가 안 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노무현 정권도 같은 통속이라 조사가 제대로 안 됐어요.”
―‘큰 잔치를 벌였다’는 말은 신동아건설 매각을 두고 하는 얘기입니까.
“그 회사를 포함해 그룹 전체를 해체시키면서 큰 잔치를 벌였다는 얘기죠. 삼풍산업도 마찬가지예요. 인수한 쪽은 은행 차입금으로 구입했는데 거의 공짜로 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법적 절차와 형평성 무시한 잘못된 판단”
![](https://monthly.chosun.com/upload/0903/0903_076_8.jpg) |
정형근 전 의원은 2002년 국회에서 대한생명 매각과 관련해 청와대 김현섭 비서관과 김승현 한화그룹 회장의 통화 내용을 도청한 국정원 도청자료를 공개했다 . |
―지금의 신동아건설이 횃불선교재단을 상대로 390억원의 청구소송을 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신동아건설이 지금 제가 있는 이곳 횃불선교센터를 지었어요. 그런데 신동아건설이 2001년 9월 일해토건으로 인수된 후 건축대금 미지급 잔액 390억원을 횃불재단에 내라고 소송을 건 겁니다. 일해토건은 신동아건설을 인수한 후 횃불선교회관으로부터 2002년 1월 15억원, 2002년 3월 135억원 등 총 230억원을 받아갔어요.
이는 받을 수 있는 확정된 미수채권으로서 매각 진행과정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채무조정 시 이를 감안해 채권금액을 상향조정하고 부채 탕감액을 축소시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대주주였던 대한생명은 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일해토건에 거액의 부채를 탕감시켜 주었어요.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한생명은 보다 많은 채권확보를 통해 대출금을 회수해 손실을 줄여야 했지만, 받을 수 있는 확정된 채권조차 제대로 받지 않고 거액의 부채를 탕감해 줌으로써 국민 혈세인 공적자금을 낭비하게 된 겁니다.”
최순영 회장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세 시간 동안 입에 물 한모금을 대지 않았다. 개인 비서가 과일 몇 조각을 내놓아도 마찬가지였다. 2인용 작은 소파에 앉은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을 이어갔다. 일흔 노인치고는 대단한 체력이었다. 대한생명 매각과정을 묻는 대목에서 갑자기 그의 말이 빨라졌다. 대한생명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이 강한 듯했다.
그가 구속될 당시 대한생명은 자산 규모 14조6800억원의 대규모 생명보험회사였다. 그러나 1999년 9월 금융감독위원회는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했다. 예금보험공사가 신주를 인수토록 하는 자본금 증가 명령과 기존주식을 무상 소각하는 자본금 감소 명령도 동시에 내렸다. 금감위는 “부채가 자산을 2조9080억원(98년 12월말 기준) 초과해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울 것이 명백하고, 해약 증가·수입보험료 감소·영업조직 동요와 이탈·유동성 부족 등으로 영업을 지속하기 어렵다”며 부실금융기관 처분이유를 밝혔다.
최순영 회장은 이에 대해 “법적 절차와 형평성을 무시한 잘못된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단지 부채가 자산을 초과해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기존 주식 전부를 무상 소각시킨 것은 신동아그룹을 공중분해시키려는 계획된 시나리오였음이 분명해요. 당시 대한생명은 유동성자금 3조5900억원을 보유하고 있었어요. 그 이후로도 매월 3조5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확보했죠. 유동성 부족으로 공적자금 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에요. 특히 동종회사인 삼성생명은 고객이 해약할 때 접수 후 3일 후에 해약금을 이체하는 방법으로 유동성을 관리했는데 대한생명은 보험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어요. 대한생명의 유동성 부족이 공적자금 투입의 원인이라면 현금을 투입해 유동성을 개선해야 하는데, 당시 정부는 현금을 투입하지 않고 채권으로 자산부족분을 보전했어요.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 채권은 2002년 6월까지 대한생명 금고 안에 그대로 보관돼 있었어요. 현찰이 있으니 채권을 현금화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이는 대한생명에 유동성 위기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겁니다. 공적자금은 국민의 세금입니다. 세금을 그냥 떼먹으면 당장 ! 형무! 소行(행)이니까 공적자금을 묘하게 받아 뒷돈을 빼먹은 거예요. 그게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순이익 내고 있던 대한생명
![](https://monthly.chosun.com/upload/0903/0903_076_9.jpg) ―다른 목적으로 공적자금이 들어갔다는 얘기군요.
“네. 이거 완전히 사기친 겁니다. 일일이 다 확인해봐야 해요. 그런데 당사자들은 지금 다들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어요. 그렇게 장난들 쳐놓고는…. 필요 없는 공적자금을 집어넣고 억지로 한화그룹에 매각한 겁니다. 전 과정을 조작한 거죠.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만들었어요. 보험회사 생리를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생명보험업은 현대자동차와 같은 제조업체와 회계방법이 전혀 달라요. 제조업은 엄연하게 자산과 부채가 뚜렷이 구분되지만, 보험업은 어떻게 보면 100%가 부채예요. 계약자가 맡겨놓은 돈이 회사 돈은 아니잖아요. 자산이니 부채니 하는 개념은 보험회사에 없는 거예요. 전문가한테 물어보세요.
그러면 뭘 기준으로 하느냐. 2008년 미국 금융위기 당시 백악관이 AIG를 포함한 몇 개 보험회사에 구제금융을 재빨리 지원했어요. 왜 줬느냐? 미국 정부는 자산과 부채를 따지지 않고 대규모 계약해지 時(시) 유동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 조치를 취했던 겁니다.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죠. 당시 우리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의 모든 보험회사를 국영화해야 합니다. 논리가 안 맞아요. 결국 당시 정권의 실세라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기업의 운명이 왔다갔다 했습니다.”
최 회장은 “당시 금감원이 발표한 부실자산 내역도 잘못됐다”며 “정부는 부실자산 규모를 3조639억원이라고 했으나, 잘못 평가된 1조4541억원을 제외하면 실제 부실 규모는 1조6098억원 정도였다”고 했다.
“당시 대한생명의 가치는 메트라이프가 산정한 것을 보면, 4조6143억원이었어요. 또 63빌딩으로 상징되는 국내 최초의 생명보험회사로서 54년간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영업조직을 가지고 있어 최소 3조원 이상의 영업가치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죠. 이 같은 대한생명의 가치를 금감원이 정당하게 반영하지 않아 결국 부실기업으로 평가 받았고 이후 거액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어요. 예금보험공사가 작성한 대한생명 당기순이익 현황을 보면, 정부기관의 불법행위 전모가 드러납니다.”
필자가 확인한 예금보험공사의 내부자료에 의하면, 대한생명은 2001년 한해 동안 8684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2002년에는 9794억원, 2003년에는 6150억원, 2004년에는 5366억원, 2005년에는 3749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최순영 회장의 말이다.
“당시 예금보험공사는 대한생명을 부실회사로 보이려고 당기순이익을 축소 발표해 2001년 추가로 1조5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어요. 불필요한 공적자금이 투입된 셈입니다. 1999년 11월에 투입된 2조원 규모의 공적자금도 필요 없는 돈이었어요. 당시 부실 생명보험회사의 구조조정 과정은 ‘경영정상화 계획서’를 받은 후 이행각서를 제출 받고, 충분한 자구기회를 부여한 후 결과에 따라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했죠. 그런데 유독 대한생명에 대해서만은 사전조치 없이 곧바로 부실금융기관으로 판정했어요. 대한생명의 국영화는 다른 생명보험회사의 구조조정 절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평성을 잃었고, 실질적인 자구 기회를 박탈당한 채 신속하게 매각이 진행된 겁니다. 엄청난 국민 혈세가 낭비되는 결과를 가져왔죠. 관련자는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청와대 朴智元 비서실장 통화 도청한 국정원
총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한생명은 김대중 정권의 끝 무렵인 2002년 12월 한화그룹에 인수된다. 문제는 매각과정이었다. 적잖은 정치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한화는 대한생명 주식 51%를 1주당 2275원, 총 8236억원에 인수했다. 당시 대한생명에는 공적자금 3조5500억원이 투입됐는데 매각 때까지 2조7000여 억원을 회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자 특혜 논란이 일었다. 우선 인수 당사자의 자격 문제가 터져나왔다. 한화그룹은 대한생명을 인수하기 전 한화종금, 충청은행의 부실경영으로 3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8000억원대의 분식회계를 만들어 금융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은 적이 있다.
李鍾九(이종구) 한나라당 의원 등 국회의원 29명은 2005년 2월 대한생명 매각에 대한 감사원의 특별감사청구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의원은 감사청구안에서 “2002년 대한생명을 한화컨소시엄에 매각하면서 정부는 공적자금 회수 실적과 매각지연에 따른 대외신인도 하락만을 우려해 인수자의 자격요건을 제대로 심사하지 않아, 과거 금융기관을 부실화시킨 전력이 있는 한화그룹에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정상화한 대한생명을 넘겼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또 2002년 대한생명 매각을 주관한 공적자금관리위원회와 예금보험공사,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에 대한 전반적인 감사도 요청했다.
인수과정에서 한화그룹은 ‘인수당사자는 보험사가 반드시 포함돼 있어야 한다’는 투자요건을 맞추기 위해 해외 생명보험회사인 맥쿼리와 비밀리에 이면계약까지 체결한 사실이 드러났다. 한화그룹은 생명보험회사를 컨소시엄 구성원으로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면계약을 체결해 맥쿼리를 참여시켰다. 이는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정한 투자자 자격요건을 위반한 것이다. 한화와 맥쿼리 간 체결한 이면계약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화그룹은 맥쿼리사의 대한생명 인수자금과 참여에 따른 제반 비용 전부를 대신해 부담하고 맥쿼리사 인수지분은 인수 후 1년이 경과한 시점에 한화건설에 매도하기로 한다. 맥쿼리의 대한생명 인수지분은 3.5%(매각가격 기준 565억원)이다. 한화그룹은 이면계약의 대가로 맥쿼리에 대한생명 운용자산의 3분의 1에 상당하는 자산의 운영권을 보장한다. 한화그룹은 이 계약에 따라 곡물 중개무역을 통해 주식매수 금액에 상당하는 곡물을 외상으로 맥쿼리에 매각한다. 맥쿼리는 곡물을 처분한 대금으로 주식인수 대금을 납부하고, 1년 후 이 지분을 인수가액에 제반 경비를 가산해 한화건설에 매각한다.>
이종구 의원은 2005년 당시 田允喆(전윤철) 감사원장에게 보낸 공개질의서에서 “대한생명은 한화그룹에 불과 8236억원이라는 헐값에, 그것도 2회 분납으로 매각했다. 이로 인한 손실은 6조4165억원에 달한다. 이는 김대중 정권 말기에 자행된 권력형 비리가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종구 의원 등 국회의원 14명은 2008년 11월 국회에 대한생명 매각에 대한 감사원의 특별감사청구안을 다시 냈다.
“한화그룹, 대한생명 인수 위해 政·官界 로비”
한화그룹은 대한생명을 인수하기 위해 정·관계 인사들에게 금품로비까지 벌였다. 한화그룹은 2002년 대한생명 매각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공적자금관리위원장인 전윤철씨를 상대로 국민주택채권 15억원을 뇌물로 건네려다 실패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與野(여야) 의원들에게는 거액의 돈을 건넸다.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과정에서 ‘김대중 청와대’가 깊숙이 관여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鄭亨根(정형근) 전 의원은 2002년 9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도청자료를 토대로 이렇게 폭로했다.
“2002년 9월 2일 한화그룹 金昇淵(김승연) 회장이 청와대 金賢燮(김현섭)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를 조기에 매듭짓기 위해 朴智元(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인수작업에 직접 나서야 한다’고 했다. 같은 날 박지원 실장은 재경부 윤모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대생 매각 문제는 중대한 사안인 만큼 윤 차관이 책임지고 9월 5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 회의에서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가 매듭지어질 수 있도록 조치하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국정원 도청자료는 실제상황을 녹음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순영 회장은 “대한생명 매각과정에서 상당한 규모의 로비가 자행됐다”고 주장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김대중 정권 사람들에게 얼마를 준 겁니까.
“그건 모르죠. 그걸 알면 뭐 이거 다 해결하게요. 구체적인 액수는 알 수 없지만 거액의 돈이 건네졌어요. 단순히 푼돈 얼마 가지고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죠. 국민 세금이 그들에게 건네진 겁니다. 돈을 줬다는 확실한 근거를 대죠. 대한생명을 인수하려던 한화는 당시 한나라당 중진이었던 徐淸源(서청원)씨에게 10억원을 줬어요.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되는데 도움을 달라고요. 그리고 노무현 측 인사인 李在禎(이재정)씨에게도 거액을 건넸어요. 전윤철씨에게도 거액을 주려다 퇴짜 맞았어요. 그게 로비를 했다는 증거입니다.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을 받는 데 그런 돈을 썼으니 실제로 대한생명을 인수한 후에는 얼마가 건네졌겠습니까. 실무자들한테 준 돈이 그 정도였으니 그 위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건네졌다고 봐야죠.
예금보험공사가 작성한 자료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 대한생명은 매년 수천억원의 이익이 났어요. 그런 회사에 3조원이 넘는 세금을 쏟아부은 후 한화가 인수했으니 잔치를 벌일 충분한 여건이 돼있었던 겁니다. 이거 기가 막힌 얘기예요. 관련자들을 모두 업무상 배임죄로 처벌해야 해요.”
‘3500억원이 소요되는 거로 하시오’
최순영 회장은 “한화그룹이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만회하기 위해 거액의 비자금을 메우려 한 정황이 있다”고 했다.
“한화가 대한생명을 인수한 후 은행권 출신인 고○○씨를 초대 사장으로 앉혔어요. 얼마 뒤 김승연 회장이 그 사장한테 ‘건설한 지 20여 년이 돼 가는 63빌딩 건물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라. 비용은 3500억원이 소요되는 거로 하시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대한생명 사장은 리모델링 비용이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 같아 실제 견적서를 받아 봤죠. 1000억원대 비용이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사장은 김승연 회장에게 ‘그렇게 비자금을 만들면 나중에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김 회장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사장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어요.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 더 재미있어요. 김승연 회장으로서는 그 사장에게 약점이 잡힌 셈이죠. 그걸 무마하기 위해 얼마 전까지도 연봉을 그대로 주고 있다고 해요. 그 사장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니까 고위직 장관을 지낸 지인과 술을 마시며 ‘한화의 김 회장이 말도 안 되는걸 시켜서 내가 안 한다고 해 회사를 그만뒀더니 연봉을 지금도 주고 있다’고 털어놨답니다.”
최 회장은 기업을 되찾기 위해 감사원 감사 청구를 계획하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감사원 감사 청구를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일들이 마음대로 되는 거는 아니죠. 제가 하나님을 믿지만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만 삽니까. 죄도 짓고, 잘못된 일을 하기도 하죠. 그래도 큰 길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올바른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분이 바른 길로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저 때문에 2000여 명의 임직원이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중 25명의 임원들은 지금의 대한생명 측으로부터 소송까지 당했어요. 임원 중 두 분은 소송 스트레스 때문에 세상을 떠났어요. 또 10여 명은 살고 있던 집까지 경매 처분됐어요. 법정에서 ‘임원들은 죄가 없다. 모두 내가 시켜서 했으니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했는데도 재판 결과는 달리 나왔어요. 저 때문에 고생하는 분들이 많아 가슴이 아파요. 좋은 날이 오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최순영 회장은 2006년 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 추징금 1575억원 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현재 체납액만 1100억원(국세 1073억원, 지방세 37억원)에 달한다. 집은 물론 집안 가재도구까지 경매처분돼 현재 빈털터리다.
“소파와 냉장고까지 경매처리됐어요. 그것도 길거리에서요. 38세금기동대가 세 번 와서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저도 추징금 체납액을 내고 싶어요. 그런데 방법이 없어요. 제가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걸요. 구치소에서 나와보니 회사가 완전 공중분해돼 없어졌는데…. 회사를 되찾으면 국가에 내야 할 추징금을 반드시 낼 겁니다. 김우중씨는 노무현 정권 때 사면됐는데…. 그 얘기는 그만하죠.
제가 지금 사는 곳은 횃불선교재단의 사택입니다. 외국인 교수들을 위한 사택인데 제가 아내와 함께 세 들어 살고 있는 겁니다. 딸은 미국으로 시집갔고, 두 아들은 집도 없이 살아요. 아들은 저 때문에 어디 취직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취직을 하면 그 회사가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이죠. 며느리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요. 제가 재산을 미리 해외로 빼돌려 돈이 있을 거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갑갑해요. 돈이 있으면 좋겠어요. 집 사람 명의로 돼 있는 땅이 조금 있는데 그걸 팔아 먹고살아요.”
前 법무차관이 사무실까지 따라와 “조선일보 비리 자료 달라”고 요구
![](https://monthly.chosun.com/upload/0903/0903_076_11.jpg)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과거 기업을 운영할 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특별한 사연이 있었습니까.
“그분은 경기高(고) 2년 선배입니다. 대우그룹은 당시 분식회계를 너무 많이 해 정부가 손을 댈 방법이 없었습니다. 1998년 하반기였습니다. 대우그룹이 20조원에 가까운 분식회계를 한 사실을 전혀 몰랐죠. 하루는 (김우중 회장이) 제게 ‘최 회장 급한데 5000억원 좀 빌려줘’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제가 ‘회장님 5000억이 애들 이름도 아니고 담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고 했더니 ‘담보야 충분하지. 대우 회계장부를 줄 테니 분석해봐’라고 해요. 장부를 보내왔기에 대출담당 직원에게 ‘살펴보라’고 했지요. 대출담당 직원이 ‘이거 하자 없습니다. 빌려줘도 됩니다’고 해요. ‘그럼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장부상으로는 대우가 연 10조원 정도 흑자를 내고 있는 것으로 돼 있는 겁니다. 기가 막히게 잘돼 있는 거예요. 1년에 10조원 흑자가 나면 5000억원 빌려주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던 거죠. 앞서 1000억원과 3000억원을 더해 총 4000억원을 대출해줬는데 3개월 만에 떼인 겁니다. 분식회계를 한 사실을 제게 숨긴 겁니다. 할 말이 없더군요. 그 이후 김우중 회장을 재판과정에 만났더니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사기 대출을 받은 이유를 안 물어봤습니까 “그거 물어봐야 뭐 합니까. 이미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던 때였는데요. 그렇게 4000억원이 공중에 날아갔습니다.” ―얼마 전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부인이 高價(고가)의 그림을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에게 상납했다는 의혹이 일면서 최 회장의 부인 이름이 또 거론됐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옷로비 사건의 실체는 전혀 없어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잖아요. 집 사람이 갤러리를 운영한 적이 있지만 그림 로비 같은 건 없었어요.”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항변하고 싶지 않습니까. “지금 와서 얘기해 봐야 뭐 합니까. 정작 필요할 때는 언론이 외면했고요. 2004년 11월 11일자 조선일보 등 주요 일간지 광고면을 보시면 잘 알 겁니다. 제가 ‘검찰총장님께 호소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저의 억울함을 호소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검찰이나 언론이 일절 반응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추가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죠. 2005년 1월 제가 법정구속된 것도 2004년 11월 광고 때문에 보복을 당한 겁니다. 제가 검찰조사를 받을 때 저를 공격하는 시민단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적이 있어요. 참여연대가 저를 완전히 저질 기업인으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세요? 당시 제가 서울지검 특수부 11층에서 조사를 받았을 때인데 어느 날 5층 어떤 검사가 저를 부른대요. 그래서 가 봤더니 ‘참여연대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거 취하하라’는 거예요. ‘안 된다’고 일주일 동안 싸웠지요. 그랬더니 나중에 검사가 ‘취하 안 하면 당신 사건에 막대한 지장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하더라고요. 결국은 취하했죠.”
최순영 회장은 “여러 차례 검찰조사를 받으면서 ‘조선일보 비리를 알려달라’는 요구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2001년 8월경이었어요. 제가 법원 2심 판결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을 때였죠. 검찰이 생각했던 것보다 형량이 적다고 판단했나 봐요. 그래서 또 무언가를 걸며 저를 오라 가라 하더군요. 한번은 정치검사로 알려진 박 모 부장검사가 저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어요. 소환당하는 날 아침 우연히 조선일보의 김대중 칼럼(편집자注-2001년 8월 11일 ‘공은 政權의 손으로’·당시 검찰은 조선일보 세무조사 고발사건을 수사 중이었다)을 봤는데 내용이 ‘검찰에서 나를 소환해 구속하려고 한다. 자꾸 오라고 소환통보가 오는데 내가 죄도 안 지었는데 왜 들어가느냐’는 거였어요. 속으로 ‘김대중 기자도 뭔가 억울한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검찰청에 갔지요.
저를 부른 부장검사실에 갔더니 그 자리에 법무부 차관을 지낸 법조인이 와 있는 거예요. 무슨 얘기를 하더니 갑자기 부장검사가 ‘최 회장, 기소유예 처분을 해 줄 수 있으니 조선일보와 관련된 비리자료를 달라’는 겁니다. 검찰이 조선일보와 김대중씨를 손보려고 하는데 결정적 증거자료가 없었던 모양이에요. ‘이놈들 정말 죽일 놈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검찰청에서 나와 횃불선교재단으로 오는데 그 법조인이 재단 사무실까지 따라왔어요. 제가 ‘차관님, 이러지 마십시오. 그런 자료 가진 것도 없고, 주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라며 돌려보냈죠. 부장검사와 차관 둘 다 같은 호남사람인데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어요. 세상이 그렇습디다. 완전히 (죄가) 없는 생사람을 잡아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검찰이 협박을 했다’고 왜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정권이 바뀌어도 관례적으로 어떤 조직이 저지른 일에 대해 조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요. 예를 들어 ‘대한생명을 한화에 팔아먹은 과정이 잘못됐다. 이면을 캐라’고 하면 나를 잡으려고 개입했던 국세청이나 금감원이 어떻게 나오는 줄 압니까?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오히려 옹호해요. 정권이 바뀌어도 그게 제대로 안 돼요. 검찰의 잘못을 얘기해도 자기네 식구들을 감쌉니다. 국세청의 세무조사 담당관이 저한테 하는 얘기가 ‘최 회장을 잡아넣었던 검사가 추가로 기소할 것이 있는지 샅샅이 찾아내라고 지시했다’고 해요. 걸릴 게 뭐 없나 하고 육법전서를 갖다 놓고 조사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정치검사들이 장난질을 심하게 했단 말이죠. 유일하게 안 한 기관은 민간조직을 다루지 않는 감사원뿐이죠. 감사원이 대한생명의 매각과정을 전부 조사하면 모든 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해요.”
‘1억원씩 너도 가져, 너도 가져라”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요. 신동아그룹 계열사를 팔아먹으면서 돈을 빼먹은 것은 곧 제 돈을 빼먹은 것과 같아요. 계열사들을 제대로 값을 쳐서 받았다면 저의 부채도 많이 줄어들 게 돼요. 다 빼먹고 최소한도로 적게 해서 ‘1억원씩 너도 가져, 너도 가져라’ 하고, 자기 뒷돈은 별도로 챙기고…. 필요 없는 공적자금은 또 추가로 들어오고…. 솔직히 말해 대한생명이 매각될 당시 1년에 8000억원씩 흑자가 나는 회사는 대한생명과 포스코를 포함해 몇 군데 없었어요. 그런 회사를 연 수익이 65억원밖에 안 난다고 정부가 판단해 공적자금 투입하고 매각한 것 아닙니까. 조작을 해도 적당히 해야죠. 이 사회가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김대중씨의 처조카 李亨澤(이형택)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구속되기 한달 전에 예금보험공사 전무로 임명됐죠. 그 사람은 공적자금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나중에 처벌받았죠. 그런 사람이 공적자금에 관여하는 예금보험공사 전무로 있었으니 할 말 다했죠. 예금보험공사가 대한생명을 팔아먹을 때 경영권 프리미엄이라는 것을 전혀 안 붙였어요. 그래서 제가 ‘이건 아니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함해 2조5000억원 이상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였죠.
당시 공적자금관리위원회에 제가 아는 성균관대 교수가 민간위원으로 들어가 있었어요. 제가 성균관대 총동창회장을 8년간 했어요. 교수들을 다 알죠. 그래서 그 성균관대 교수에게 사람을 보내 ‘당신이 어떻게 대학 교수로서 그렇게 부정직한 일을 하느냐’고 항의했지요. 그랬더니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그 교수를 해촉하고 대한생명 문제를 처리하더군요. 그런데 일??끝나자 곧바로 그 교수를 다시 위원으로 복직시켰어요.
그당시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위원장이 전윤철씨였죠. 그 사람은 ‘나는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인데 대한생명이 그런 식으로 매각되는 걸 보면 그 사람보다 더 높은 곳에서 압력이 있었다고 봐야죠.”
‘이러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거 아닌가’
![](https://monthly.chosun.com/upload/0903/0903_076_12.jpg)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가능할까요.
“회사를 팔아먹은 건 아직 시효가 남아있어요. 대한생명이 매각된 게 2002년이니까 2012년까지 공소시효가 살아있습니다. 시효가 지난 것이더라도 진실은 밝혀져야죠.”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와 관련해 김승연 회장은 전혀 관련이 없었던 걸로 압니다.
“한화 부회장이 대한생명 인수를 총괄했다고 하더군요. 김승연 회장은 맥쿼리와의 이면계약 등 자세한 사항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걸 사실이라고 믿을 사람이 대한민국에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이 밝혀야죠. 그런 걸 가지고 덮어두면 대한민국이 올바른 나라가 아니죠. 李健熙(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아들 재용씨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편법을 썼다가 김용철이라는 사람이 폭로하니까 결국 법정에서 재판까지 받은 거 아닙니까.”
―그룹이 공중분해되는 과정을 어떻게 지켜봤습니까.
“아무리 제가 하나님을 믿는 장로라고 하지만 인간인데 차마 못 견디겠더군요. 몇 달을 구치소에서 울었어요. 머리를 벽에 치며 자살도 생각했지요. 다행히 자살방지용 고무가 사방에 붙어 있더군요.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몸도 약해졌죠. 먹지도 못하고.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게 맞아요. 분한 마음이 가득 차 있으니 기도도 안 되더군요.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니 몸이 많이 상하더군요. 집안 내력인데 다들 심장이 안 좋아요. 선친도 그렇고, 저와 두 아들도 모두 심장수술을 했어요.
구치소에 있는 동안 ‘이러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거 아닌가’ 하는 공포가 밀려왔어요.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게 낫다는 생각에 화를 참고 또 참았죠. 기도를 열심히 했죠. 사람이 잘못되는 근원은 모두 욕심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께 ‘제가 돈이 많았다가 없어졌다고 해서 죽는다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죠. 포기하니까 차츰 마음이 편해집디다.”
최순영 회장은 요즘 신앙간증과 선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그는 신동아그룹 회장으로 있을 때도 종교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광림교회, 경동교회, 온누리교회 등 교회 건물 신축에 재정적 후원을 했고, 극동방송국 사옥을 지어 기부했다. 1980년 초에는 경영난에 빠져있던 영생학원을 인수해 전주대·전주비전대학 등을 기독교대학으로 만들었다. 1995년에는 195개국 4000여 명의 세계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이른바 ‘기독교의 올림픽대회’인 ‘GCOWE 95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하는 데 노력했다.
63빌딩 레스토랑에서 발견한 안기부 도청기
그는 “신동아그룹을 잃은 후 오히려 신앙심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 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편해요. 이제 억만금이 들어와도 저를 위해 쓰지 않겠다고 기도하죠. 요즘 대한생명의 자산이 50조원이라고 합디다. 어마어마한 돈이죠. 하나님이 제게 ‘너 나이 칠십인데 그 많은 돈을 가져다 뭐 할래’라고 질문하시는 것 같아요. 그걸 가지고 제가 뭐하겠어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어졌어요. 주시면 감사하고 안 주셔도 하나님 뜻이니까 감사하고…. 제 얼굴을 보세요. 편안해 보이지 않아요? 구치소에 있으면서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었어요. 진실은 밝히되, 김대중 정권의 실세들이 나쁘다, 김태정 총장이 나쁘다, 이런 생각은 안 해요. 이젠 다 접어놔야죠. 2006년 김태정씨로부터 사과도 받았고, 국세청에서 만난 사람들도 사과하겠다고 해요.”
―김대중 정권의 인사들이 사과한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몇 년 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인 박지원씨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자주 찾아왔다면서요.
“박지원이라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에요. 자기는 관련 없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그 사람도 당시 비선조직 실세들과 동조한 사람이지요. |